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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사 상식 5) 폴리스를 멸망시킨 어리석은 시민들
    세계사 상식 2023. 9. 13.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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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르타의 군국주의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에 정착한 도리아인이 그 정복지에 건설한 폴리스입니다. 스파르타에는 세 종류의 신분이 있었는데, 가장 높은 신분은 '스파르타인'으로 이들이 시민이었습니다. 두 번째 신분으로는 '페리오이코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로, 군사적 의무는 있으나 참정권이 없는 불완전한 시민이었습니다. 신분제의 가장 하위에는 '헤일로타이'가 있었는데 이들은 노예와 다름없었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은 매우 엄격하게 자식들을 가르친 것으로 유명합니다. 스파르타의 사내아이들은 만 7세가 되면 부모와 함께 살지 못하고 합숙소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합숙소에서 먹고 자고 신체를 단련하는 생활을 30세까지 계속했습니다. 30세가 되면 가정으로 돌아가 생활할 수 있게 되지만 이때에도 저녁 식사만큼은 남자들끼리 모여 공동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만약 이 저녁 식사에 불참할 경우 시민의 자격을 박탈당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연히 스파르타의 남성들은 다른 어느 폴리스의 사내들보다도 단합이 잘 되었고 이것이 전쟁에서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했음은 물론입니다. 스파르타의 육군이 그리스 최강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듯합니다. 이른바 국가에서 직접 교육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가장 큰 덕목으로 치는 스파르타 교육을 통해 강력한 군국주의 체제를 지탱해 온 것입니다. 스파르타의 정치는 60세 이상의 남자 시민으로 구성된 장로회가 실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참정권을 갖지 못한 페리오이코이에게 군역의 의무를 지웠고, 피정복민 아카이아인을 구유 노예로 삼아 에일로타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 헤일로타이의 반란에 대비해, 기원전 500년 무렵 '리쿠르고스 제도'가 정비됐습니다. 이는 소유지의 매매와 귀금속 및 화폐의 사용을 금지한 것으로, 시민들 사이에 빈부의 차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폴리스의 쇠퇴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뒤 여러 폴리스들은 페르시아의 재침략에 대비해서 델로스 동맹을 결성했습니다. 자연스레 델로스 동맹의 맹주인 아테네의 위상은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아테네는 다른 폴리스로부터 거둔 군자금을 전쟁으로 파괴된 아테네의 부흥을 위해 사용하는 등 전횡을 일삼아 다른 폴리스로부터 반감을 샀습니다. 결국 기원전 5세기 후반,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형성된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아테네의 세력 확대에 대항하여, 그리스의 패권을 둘러싸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 전쟁에서는 페르시아 제국의 원조를 받은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스파르타의 패권은 오래 가지 못하고 곧 내전 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스파르타의 동맹국 중 '테베' 라는 폴리스가 있었는데 테베의 에파미논다스는 사선진이라는 새로운 전법을 이용해 스파르타를 물리치고 그리스의 패권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 지배도 오래가지 못하고, 각 폴리스는 데마고고스(선동 정치가)에 의해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중우정치에 빠져, 차례로 쇠퇴해 갔습니다. 

     

     

    자유가 가져 온 인간 중심의 문화

    인간의 만물의 척도이다

       그리스 문화는 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자유로운 시민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중심의 현세적인 문화는 밝고 명랑하고 합리적이며, 조화와 균형을 존중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신을 공포의 대상이 아닌 인간의 성품을 지닌 전능한 주재자로 보았고, 신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를 확대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사고방식은 현세적 다신교로 이어져 인간의 모습과 감정을 지닌 올림포스 12신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리스인들의 우주와 세계의 본질에 대한 관심은 질료와 형상으로 이어졌고, 인간의 내면과 근원적인 본성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인간 정신이 태어나서 질서를 부여하기 전까지 만물은 혼돈 속에 있었다"라고 한 아낙사고라스의 말처럼 이 시대에는 인간의 이성적 시각을 통한 세계 인식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렇듯 이성과 합리로 무장한 그리스 문화는 오리엔트 문화의 바탕 위에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여 유럽 문화의 원류를 형성했습니다. 

     그리스는 훌륭한 문학 작품들로도 유명한데, 특히 호메로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의 활약상을 그린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기록했습니다. 기원전 5세기에는 국가 행사로 발전해 온 비극이 전성기를 맞이하여, 3대 비극 시인 아이스큐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가 활동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저술하고, 페르시아 전쟁을 체계적으로 논하여 역사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미술 분야에서는 조화와 균형이 잡힌 사실적 미학이 깊이 연구되어, 도리아식 건축인 '파르테논 신전'과 페이디아스의 '아테나 여신상' 등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스 철학의 탄생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을 받은 미레토스를 중심으로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자연 철학이 발생했습니다. 자연 철학의 핵심은 사물의 근원 즉,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었습니다. 기원전 580년경에 활약한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  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옳고 그름을 떠나 사물의 근원을 다져볼 때 처음으로 신을 배제하였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이후 기원전 500년경에 헤라이클레이토스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 아닌 '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논쟁이 발전하여 후에 데모클리토스는 만물의 근원은 '원자'라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추상의 극한에서 만물의 근원이 '수'라고 주장한 피타로가스가 등장했습니다. 신을 배제하고 수많은 사실을 관찰하여 그 사실들을 일관된 상으로 엮어내기 시작한 이들 철학자들을 아울러 '이오니아학파' 라고도 합니다. 이후 아테네 전성기의 민주정치가 반영되어, 철학의 대상이 자연현상에서 인간을 향하게 됐습니다. 그리스의 3대 철학자라 일컬어지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두 다 '진리'를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진리를 어떻게 추구하느냐 하는 점에서는 각기 다른 주장을 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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