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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사 상식 4) 에게 문명 - 그리스 문화의 모태
    세계사 상식 2023. 9. 13.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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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게 문명의 탄생 - 크레타 문명과 미케네 문명

     에게 해는 크레타 섬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만으로, 이곳을 중심으로 지중해의 크레타 섬과 그리스의 미케네, 티린스 및 소아시아의 트로이가 삼각형 모양으로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일어난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지역의 문명을 그리스에게 전달하는 교량적 역할을 한 에게 문명으로, 서양사의 가장 오랜 문명 중심지 중의 하나입니다. 에게 문명은 소아시아 계통의 사람들이 이룬 남방계 도서 문화인 크레타 문명과 그를 멸망시킨 인도유럽 어족의 아카이아인들이 이룬, 북방계 본토 문화인 미케네 문명으로 구성됩니다.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을 받은 크레타 문명은 오리엔트 문명의 강력한 왕권을 모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리엔트와는 달리 비교적 자유롭고 세련된 청동기 문명을 발전시켰습니다. 하지만 소아시아 계통의 크레타인들이 발전시킨 크레타 문명은 기원전 1400년경 그리스인의 분파인 아카이아인의 침입으로 멸망했습니다. 크레타 문명의 멸망을 전후로 아카이아인이 미케네 문명을 일으켰지만 기원전 1200년경, 철기를 사용하는 그리스인의 분파인 도리아인의 남하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폴리스의 탄생

     미케네 문명이 멸망한 뒤 수백 년간의 이렇다 할 역사적 기록이 없어 암흑 시대로 분류됩니다. 그리스 문명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기원전 8세기 무렵입니다. 그리스 문명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남단을 중심으로 이오니아 지방에 이르러 발생했습니다. 기원전 20세기 무렵부터 이 지방으로 남하해 온 아카이아인과 이오니아인, 도리아인을 합해서 그리스인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인도유럽계 민족에 속합니다. 처음 이들은 많은 도시국가들 만들어 생활했는데, 이 도시국가를 폴리스라고 한합니다. 폴리스의 한가운데에는 대체로 작은 언덕이 있고, 언덕 위에 성채가 있어 전시 상황에는 이곳이 최후의 방어선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도시의 중심이 되는 언덕을 가리켜 '아크로폴리스'라고 하며, 아크로폴리스 기슭에는 광장인 '아고라'가 있었습니다. 아고라에는 평의장과 재판소 등이 세워져 시민들의 사교장이 되었습니다. 아고라를 중심으로 시민들의 주택이 밀집해 있고, 그것을 둘러싸고 성벽을 쌓았습니다. 이 구조는 폴리스의 전형적인 구조로 그리스 본토와 이오니아 지방에 넓게 퍼져 있었습니다. 노예제 사회의 폴리스에는 귀족과 평민, 노예로 나눠지는 계급제가 존재했습니다. 평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농민이었으며, 농민들은 가족과 소수의 노예를 부려 폴리스 주변의 사유지를 경작했습니다. 농민 외의 수공업자와 상인은 귀족과 함께 폴리스의 중심부에 거주했습니다. 귀족과 평민은 시민에 속했지만 노예와 외국인에게는 시민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올림피아의 제전 

     그리스에는 모든 폴리스가 참가하는 여러 축제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올림피아의 제전으로, 오늘날의 올림픽 모태가 됩니다. 기원전 8세기부터 4년마다 열린 올림픽은 각 폴리스를 대표한 선수들이 올림피아에 모여 원반던지기를 하거나 레슬링 등의 경기를 벌이면서 서로 영예를 경쟁했습니다. 우승 상금은 없었지만 우승자는 전 그리스 세계에 이름이 알려지고 우승자의 조각상이 신전에 봉납되기도 했습니다. 올림픽은 단순한 스포츠 경기라는 개념을 뛰어넘어 그 자체가 최고신 제우스에게 바쳐지는 일종의 종교 의식이었습니다. 올림픽 기간에는 모든 전쟁이 휴전에 들어갔습니다. 휴전을 깨는 폴리스에게는 올림픽의 참가권을 박탈하고, 델피의 신탁을 받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스인 모두가 받고 있었던 델피의 신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었습니다. 

     

     

    민주주의 아테네와 군사 강국 스파르타

    민주정치의 탄생

     해외 무역이 활발해진 아테네에서는 상공업과 노예제의 발달로 부유한 평민층이 출현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폴리스를 지키는 전쟁에 나서는 것을 매우 영예롭게 생각했기 때문에 전쟁 또한 귀족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번 평민들도 중장보병으로서 전쟁에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무기를 갖춰 중장보병으로 활약하면서 힘을 얻게 된 평민들은 "귀족과 같이 시민의 의무를 다하고 있으니 참정권을 달라"고 요구하며 귀족과 대립했습니다. 이에 기원전 594년에 아르콘(국가의 행정을 맡아보았던 최고 적임자)으로 선출된 솔론이 귀족과 평민의 조정자로서 개혁을 시행했습니다. 이른바 금권정치라고도 부르는 솔론의 개혁은 재정에 따라 권리와 의무가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솔론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페이시스트라토스라는 인물이 평민과 귀족의 대립을 이용하여 독재자(참주)의 자리에 오릅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가난한 평민을 경제적으로 돕는 시책을 적극 시행했습니다. 

      기원전 508년에 등장한 클레이스테네스는 귀족의 권력 기반이 되어온 낡은 부족 제도를 폐지하고, 시민을 30개의 데모스(구)별로 등록했습니다. 이로써 귀족은 이름뿐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각 데모스에서는 18세가 되면 시민권을 얻어, 정책을 결정하는 총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도편추방제를 통하여 참주의 출현을 막고 민주정치의 기초를 공고히 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500년, 이오니아 지방의 밀레토스 등의 폴리스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폴리스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 아테네가 식민지의 반란을 직접적으로 지원하게 됩니다. 페르시아는 곧바로 이 반란을 진압하지만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아테네가 반란을 지원한 것에 대해 크게 분노합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리스 대 페르시아의 3차에 걸친 페르시아 전쟁이 시작됩니다. 기원전 492년에 그리스를 침공한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북부를 정복했으나, 태풍으로 인해 철수했습니다. 최초의 본격적인 전투라고 할 수 있는 2차 전쟁은 기원전 490년에 일어났습니다. 아테네 북동쪽에 있는 해안 지역 마라톤에 페르시아군이 상륙하자 아테네군은 다른 폴리스로부터 지원받은 원군과 합류하여 페르시아군에 대항했습니다. 이때 그리스 최강의 군사 국가인 스파르타가 보름달 이전에는 출전을 금한다는 금기 때문에 출전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페르시아군을 격파했습니다. 10년 뒤, 다리우스 1세의 뒤를 이은 대왕 크세르크세스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또다시 아테네를 침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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