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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사 상식 7) 세계주의를 표방한 헬레니즘 제국
    세계사 상식 2023. 9. 1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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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 원정에 나선 알렉산더 대왕

     기원전 5세기까지 그리스 주변의 후진국이었던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인과 같은 민족이면서 거의 야만인 취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케도니아를 강국으로 발전시킨 것은 기원전 4세기에 나타난 필립포스 2세였습니다. 그는 군제 개혁과 광산의 개발로 국력을 키워, 카이로네이아의 전투에서 아테네-테베 연합군을 물리치고 그리스를 통일했습니다. 이어서 스파르타를 제외한 모든 폴리스와 코린트 동맹을 맺고 페르시아 제국 침공을 계획하였으나, 내분에 의해 기원전 336년에 암살당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바로 이 필립포스 2세의 아들로 전 그리스군을 이끌고 동방 원정에 나섰습니다. 알렉산더는 이소스 전투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물리쳤습니다. 당시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3세가 패주 도중 암살되면서, 기원전 300년에 페르시아 제국이 멸망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원정을 계속하여 그리스에서 서북 인도에 이르는 세계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모델로 한 정치 조직을 만들고, 그 자신도 페르시아 왕녀와 결혼하는 등 동서 융합 정책을 펼쳤지만, 33세의 젊은 나이에 급사하면서 그의 제국은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의 왕조,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 나뉩니다. 그중에서도 이집트는 상업 교역으로 번성했고,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됩니다. 그리스와 오리엔트의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세계는 이후 약 300년간 이어졌습니다. 

     

    헬레니즘 문화의 특징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 이래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멸망한 기원전 30년까지의 약 300년간을 헬레니즘 시대라 하고, 알렉산더의 제국에서 갈라진 나라를 헬레니즘 제국이라 부릅니다. 가장 갈게 지속된 헬레니즘 제국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입니다. 그 마지막 왕이 클레오파트라인데, 그녀는 이집트인이 아닌 그리스인의 후손이었습니다. 

     헬레니즘 문화의 특징은 한마디로 세계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의 폴리스 중심의 좁은 가치관을 부정하고, 폴리스의 틀을 뛰어넘는 국제적 세계관에 기초한 코스코폴리터니즘(세계시민주의)을 주창한 헬레니즘 문화는 개인주의를 중시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세계 시민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두고 두 가지 철학이 유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금욕주의의 스토아 학파와 쾌락주의의 에피쿠로스 학파였습니다. 스토아 학파가 금욕을 통한 마음의 평안을 목표로 하였다면, 에피쿠로스 학파는 마음의 평안이 최고의 쾌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헬레니즘 시대의 미술작품으로는 사실적 조각의 대표작, '밀로스의 비너스' 등이 있습니다.

     

     

    지중해 세계를 변화시킨 로마의 출현

    로마의 공화정

      수많은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도시국가 중의 하나였던 로마는 이탈리아인의 분파인 라틴인이 기원전 753년에 티베르 강 하류에 건국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초기 로마는 에트루리아 계통의 왕이 다스리는 왕국이었으나 작은 도시국가들을 유지하는 데 그다지 강력한 왕권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원전 6세기 말, 라틴인 귀족이 에트루리아인 왕을 추방하고 공화정을 수립했습니다. 이때부터 원로원으로 불리는 귀족들의 의회가 로마의 정치를 주도했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귀족, 평민, 노예의 계급이 있었고, 실제로 국가의 주도권은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기병과 무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귀족에게 있었으므로 이 공화정을 귀족 공화정이라 불렀습니다. 

       국정의 중심인 원로원에서는 행정과 군사를 담당하는 2명의 콘솔(집정관)이 최고의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이는 어느 한 사람에게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습니었다. 또한 귀족은 종신의원으로서 국가의 입법, 행정, 재정, 종교 등의 결정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무렵부터 국방의 주력을 차지하는 중장보병으로 활약한 평민이 힘을 키워 평민회가 구성됐습니다. 초기 로마의 민주제를 향한 움직임은 아테네의 평민 성정 과정과 매우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민회에서 선출된 호민관은 원로원의 결의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기원전 367년에는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 법이 발표되어 집정관 중 한 명은 반드시 평민으로 선출하도록 했습니다. 이어 기원전 287년에는 호르텐시우스법이 발표되어 평민들의 의회인 평민회가 원로원과 대등해졌습니다.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로마

     기원전 272년, 주변 도시국가와 부족을 정복해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로마는 정복한 국가와 부족을 분할통치 방식으로 지배했습니다. 분할통치 방식이란 점령한 도시국가와 동맹을 맺어 자치를 인정해 주는 것으로, 피정복 도시가 서로 결속하여 로마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각 도시마다 권리와 의무에 차별을 두는 통치 방식이었습니다. 동맹국들은 로마에 대한 납세의무는 없고, 전쟁 시에 군사를 지원할 의무만 있었습니다. 

     

    포에니 전쟁과 지중해 세계의 통일

     이윽고 지중해까지 세력을 뻗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남단의 시칠리아 섬에서 지중해의 상업 교역권을 쥐고 있던 카르타고와 격돌하게 되었습니다. 페니키아인이 건설한 식민도시였던 카르타고는 당시 서지중해 무역을 지배하는 대국이었습니다. 로마인은 카르타오인을 포에니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오늘날 로마와 카로타고간의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고 합니다. 

     포에니 전쟁은 3차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제1차 전쟁에서 로마는 카르타고를 격파하고 시칠리아 섬을 속주로 삼았습니다. 제2차 전쟁에서는 스페인을 본거지로 삼은 카르타고의 용장 한니발이 코끼리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쳐들어갔습니다. 한니발은 칸네 전투에서 5만이 넘는 로마군을 몰살키시기도 했지만 카르타고를 기습한 로마군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제3차 전쟁에서 카르타고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로마군에 포위된 채 칩거를 하는 형태로 전쟁을 치렀습니다. 로마군은 4년간이나 카르타고군을 포위한 끝에 카르타고를 함락시키고 주민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며, 땅에는 바닷물을 뿌려 사람이 살 수 없게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카르타고는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이리하여 로마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포함한 서지중해 전역을 제패하게 되고, 세계 제국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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