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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사 상식 9) 로마 제국에 좌우된 초기 기독교
    세계사 상식 2023. 9. 13.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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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시민의 생활과 문화

     팍스 로마나 시절의 로마 시민들은 아무 재산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광대한 속주로부터 거둬들인 재화가 로마 시민에게 뿌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폭군으로 유명한 네로 황제는 부유한 시민을 사형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해 병사나 민중에게 그 일부를 나눠주어 인기가 높았다고 합니다. 칼리굴라 황제도 실제로 금화를 민중에게 뿌리기도 했습니다. 이때 유행한 게 바로 공중탕이었는데 로마시민들은 거의 무료나 다름없는 값싼 비용으로 누구나 다 공중탕을 즐겨 이용했습니다. 규모로는 카라칼라 황제가 만든 것이 가장 컸지만 그 이외에도 로마 시내에만 1,000여 군데의 공중탕이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부유한 시민과 귀족들의 사치와 타락은 끝이 없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꽃을 피운 로마 문화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창성보다는 법률과 토목 등 실용성이 뛰어나다는 특색이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언제나 공정함을 요구해 항상 법을 존중하였는데, 로마가 남긴 최대의 문화유산인 로마법은 6세기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로마법 대전" 으로 집대성 되었고, 훗날 유럽 각국으로 계승 됐습니다. 

     토목과 건축 분야에서는 콘크리트를 사용한 신전 판테온과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경기장인 콜로세움, 군용 도로(아피아 가도 등), 3중식 수도교 등이 있습니다. 문학에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을 묘사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게르만인 사회화 관습을 기록한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역사에는 갈리아 원정을 기술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등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발흥

     로마의 속주였던 팔레스타인(유대 지방)에서는 예수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당시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교의 유대인만을 특별시하는 선민사상과 계율의 형식만을 중시하는 맹목적 율법주의를 비판하고, 민족과 계급을 넘는 신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역설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때마침 유대인의 로마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된 메시아(구세주) 신앙과 얽혀 급속히 확산됐습니다. 이윽고 베드로와 바울 등에 의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 제국 각지에 전도되면서, 모든 계층에서 신도가 증가했습니다. 그리하여 2세기 중반에는 '신약성서'가 편찬되어, 유대교의 '구약성서'와 더불어 2대 경전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기독교도가 황제 숭배를 부정한다는 이유로 이를 탄압했지만, 신도들은 굴하지 않고 세력을 키워나갔습니다. 제국의 통일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박해나 탄압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공인했습니다. 그후 기독교는 4세기 말,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로마 제국의 국교로까지 인정됐습니다. 

     

    실크로드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싸움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에 이란 고원은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하에 놓여,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이란 동북지방 카스피 해 동남부 파르티아에서 북방 이란계 유목 민족인 파르니족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아르사케스는 동생 티리다테스와 함께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독립하여 파르티아를 세웠습니다. 파르티아는 동방에선 쿠샨 왕국, 서방에선 셀레우코스 왕조와 끊임없는 대립 항쟁을 되풀이해야 했습니다. 또 토착 농경민을 중심으로 한 국내 제후의 반란과 왕실 내부의 갈등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 시리아는 시리아에서 독립한 박트리아를 공격하고, 나아가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여, 동서 무역의 이익을 독점했습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에서 이란까지 가는 길은 실크로드로 알려진 동서 교통로의 일부로, 막대한 이익을 낳는 매력적인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이익에 눈독을 들인 로마 제국이 동방에 진출하여 기원전 1세기에 시리아를 멸망시켰습니다. 그 후 이란 고원으로 몰려온 로마는 파르티아와 치열한 공방을 펼쳤습니다. 게다가 1세기에는 인도의 쿠샨 왕조와 동서 교통로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대립하면서 국력이 쇠약해져, 결국 사산조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사산조 페르시아

     이란 서남지방 파르스의 오아시스 농경 지대를 통일한 아르다시르는 226년에 파르티아를 멸망시키고 사산조 페르시아를 창시했습니다. 아르다시르 1세와 쿠샨 왕조를 멸망시킨 샤프리 1세는 260년에는 시리아에서 로마 황제를 포로로 하는 등 사산조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호스란 1세 시대에는 당시 강대한 세력을 과시하던 비잔티움 제국을 제압하며 인도의 굽타 왕조와 국경을 접하고 시리아와 예멘을 탈취하여 최대의 판도를 형성했습니다. 이 무렵 사산조 페르시아는 인도 및 중국과의 교역도 활발해졌고, 동서 교통로를 지배하고 있었던 터라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습니다. 인도와 그리스의 요소를 가미한 미술 굥예로 대표되는 사산조 문화는 서쪽으로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유럽까지,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에서 수/당 시대의 중국, 나아가 아스카/나라 시대의 일본으로까지 흘러갔습니다. 그러나 7세기에 접어든 뒤에도 비잔티움 제국과의 항쟁이 끊이지 않았고, 여기에 내분까지 발생하면서 차츰 국력이 쇠약해져갔습니다. 

     사산조의 종교는 조로아스터가 국교가 되어 현재의 아베스터 경전이 성립했으나, 마니교, 유태교, 네스토리우스교, 불교 등도 함께 혼재해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정치적 통일을 목적으로 종교적 통일을 시도한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사회의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미술 분야에서는 아케메네슺와 파르티아조의 전통과 헬레니즘의 영향을 계승하여 독특하고 새로운 이란 미술을 형성했습니다. 금은세공, 장신구, 직물, 유리 기구, 악기 등에 뛰어난 공예품을 많이 남겼으며 이러한 문화적 요소들은 비잔틴 제국과 기독교 교회를 중심으로 유럽 각지에 퍼져 나갔으며, 인도/중앙아시아/중국/한국/일본 등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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