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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사 상식 27) 비잔틴 제국과 교회의 분열
    세계사 상식 2023. 9. 25.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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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잔틴 제국의 성립

       동로마 제국은 기원전 8세기에서 200년 동안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비잔티움에서 이름을 따와 비잔틴 제국이라고 불렀다. 비잔티움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옛 이름이다. 

       비잔틴 제국의 전성기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다. 그는 마케도니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36세가 되던 해 그를 키워준 숙부가 황제로 추대된다. 527년, 그의 숙부가 죽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에 오른다. 그는 6세기에 게르만 민족의 동고트 왕국 그리고 반달 왕국을 멸망시키고 지중해 연안을 제패했다. 또한 법학자 트리보니아누스에게 "로마법 대전"을 편찬케 하고, 국내 통일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는 탄압적이었다. 국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렸고 잦은 전쟁으로 인한 징병 제도 등으로 민중 반란이 일어났다. 수많은 희생자들을 내며 반란을 진압한 그는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재건하면서 세계 최대의 성당인 성 소피아 성당을 비롯해 많은 건축물을 지었다. 대로마 제국의 재건을 목표로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가 죽다 사산조 페르시아와 프랑크 왕국과의 대립으로 인해 비잔틴 제국은 국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7세기 여러 정책들을 실시해 중앙집권과 군사력의 강화를 추진하지만 중반부터 시작된 이슬람군의 공격으로 시리아와 이집트를 빼앗기고, 발칸반도에서 슬라브인의 침입을 받는 등 제국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 후에도 셀주크 왕조와 십자군의 침입을 받아 더욱 약해져, 1453년에 이르러서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동방 정교회의 성립

        8세기 초,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레오 3세가 교회에 안치된 성화 등 모든 성상을 파괴하라고 지시한다. 정치 권력과 교회 간의 힘겨루기였다. 이탈리아 통치권을 놓고 비잔틴 제국과 교황 사이에 갈등이 빚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태는 6세기 이후 꾸준히 빚어져 온 일이었다. 비잔틴 제국은, 황제를 국가의 중심적 교회의 수장으로 삼았다. 종교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 모두를 황제가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힘을 이용한 황제 레오 3세는 가톨릭교도의 성상 숭배를 금지하는 성상 금지령을 내리고, 위반하는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하여 제국의 재원 확보에 활용했다. 포교 활동에 성상을 이용하고 있었던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대립을 초래하여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가톨릭에서 멀어져 황제 권력하의 독자적인 신학과 의식을 행하는 동방 정교회가 됐다. 

     

    슬라브 민족

       슬라브 민족은 1세기 동유럽 드네프르 강 상류부터 흑해 연안에 걸쳐 세력을 넓히며 살고 있었다. 6~7세기 이후, 아시아계 유목 민족이 침입하자 게르만 민족과 마찬가지로 민족 단위의 대이동을 시작하여 동유럽과 발칸반도로 퍼져나갔다. 이렇게 퍼져나간 슬라브인은 주로 러시아인이 된 동슬라브족과 폴란드인이 된 서슬라브족 그리고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인이 된 남슬라브족으로 분류된다. 슬라브 민족의 종교는 정착지에 따라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로 나뉜다. 

     

    동슬라브

       9세기 말, 슬라브족 최초의 국가인 키예프가 건설되었다. 동슬라브족의 러시아인이 세운 국가였다. 10세기 말, 블라디미르 1세 때 비잔틴 제국은 동방 정교를 국교로 삼았다. 키예프에서는 12세기 무렵부터 대토지 소유제가 진행되면서, 많은 농민이 농노로 전락하여 국내가 불안정해졌다. 그리고 13세기에 몽골인의 습격을 받아 키예프는 붕괴되었다. 이후 약 200년간 러시아인은 몽골인 바투가 세운 킵차크한국의 지배를 받았다. 14세기로 접어들자 킵차크한국의 쇠퇴를 틈타 그 지배하에 있던 모스크바가 독립을 시도했다. 모스크바는 상업 활동으로 이익을 얻어 세력을 키운 뒤, 1380년 킵차크한국과의 전투에서 그들을 물리치고 지배에서 벗어났다. 15세기 후반, 국왕 이반 3세는 러시아 전체를 통일하고 사법 제도와 행정 제도를 전면적으로 정비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또한 비잔틴제국이 멸망하자 비잔틴 제국 황제의 조카딸과 결혼한 이반 3세는 그 후계자를 의미하는 차르의 칭호를 사용했다. 나아가 그는 동방 정교회에서도 수장의 후계자가 되었고, 모스크바의 크렘린 교회당은 정교회의 총본산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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