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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사 상식 29) 크리스트교 중심의 중세 문화
    세계사 상식 2023. 9. 27.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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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중세 문화는 융합의 문화

       절대적으로 크리스트교 문화의 지배를 받았던 중세 서유럽 문화는 크리스트교를 중심으로 한 로마 문화와 게르만 문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서 간의 오랜 전쟁을 통해 이슬람 비잔틴 문화의 영향도 받았다. 특히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이베리아 반도의 코르도바에서는 유럽 각지에서 온 유학생들이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과 아라비아의 고도의 수학과 천문학을 배웠다. 

     

    유럽의 대학과 학문

       1150년경 이탈리아의 볼로냐에 유럽 최초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이 생겼다. 주로 법학과 여러 학문을 가르쳤으며, 그중에는 아라비아의 의학을 가르친 살레르노 대학도 있었다. 이 외에도 신학을 가르친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과 프랑스의 파리 대학이 유명하다. 공용어는 라틴어였고, 학문 중에서는 신학이 최고로 여겨져 크리스트교에서 분리된 학문이나 사상은 있을 수 없었다. 신한에서는 크리스트교의 교리를 심층 연구하고, 신앙과 이상의 조화를 추구하는 스콜라 철학이 성행했다.  스콜라는 라틴어로 '학교'라는 뜻으로 게르만인에게는 교양을 익히게해 준 수도원을 가리켰다.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가 영국에서 신학자 앨퀸을 초청하여 학교를 연 것이 기원이다. 스콜라 철학은 "신학대전"을 저술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대성했다. 자연 과학 분야에서는 로저 베이컨이 관찰과 실험을 중시하여 근대 과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유럽 문학과 건축

       문학 작품으로는 기사도를 주제로 하고 카를 대제의 스페인 원정을 소재로 다룬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가 있다면, 게르만 민족 이동 시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룬 독일의 "니벨룽겐의 노래"가 있다. 또한 영국에는 "아더 왕 이야기"가 있다. 건축 분야에서는 11세기에 이슬람의 돔을 본따 로마네스크 양식의 피사 대성당이 세워졌으며 12세기에는 첨탑과 스테인드글라스가 특징인 퀼른 대성당 등의 건축물이 세워졌다. 또한 독일에서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보름스 성당이나 마인츠 성당들이 지어졌다. 

     

    도시의 발달

       십자군 원정이 이루어지던 무렵, 봉건제도에서 벗어나 자유와 자치를 확보한 도시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11세기에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는 자치 도시가 되었고, 그중에는 도시 공화국으로까지 발전한 도시도 있었다. 당시의 상공업자들이었던 도시 시민은 상호 부조와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동업자 조직인 길드를 조직했다. 이 길드는 힘을 비축하여 시정에 간섭하기에 이르렀다. 수공업자들의 길드로 조직되었고 이러한 가운데 황제와 교황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힘을 지닌 대상인들도 나타났다. 제4차 십자군 전쟁은 베네치아 상인들의 농간으로 성지 탈환이 아니라 밀린 대금을 회수하기 위한 전쟁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약탈을 저지르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장원제의 붕괴

       13세기 무렵부터 도시가 발전하면서 화폐 경제가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자 힘을 얻은 상인들은 황제나 때론 교황에 이르기까지 그 세력을 뻗치기도 했다. 결국 전통적인 주종 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또한 도시 경제의 발전은 농작물의 수요를 증가시켰다. 그러나 농민이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어 생활이 윤택해졌다. 부의 축적은 많은 변화를 촉발시켰다. 과거 영주의 직영지에서 부역을 하던 농부들은 사라지고 농부에게 토지를 빌려 주고 수확물을 징수해 이것을 화폐로 바꾸도록 했다. 그러나 농노 중에는 잉여 생산물로 부를 축적하는 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잉여 생산물을 영주에게 해방금으로 내고 농노 신분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과거의 농노는 자유로운 농민이 되어 갔고, 영주는 지주가 되면서 전통적인 봉건제도를 지탱하던 장원제가 무너져 갔다. 

     

    교황의 쇠퇴

       1309년, 교황 클레멘스 5세는 로마에서 벗어나 프랑스의 아비뇽에 머물렀다. 프랑스의 필립 4세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었다. 필립 3세 시절에는 교황인 보니파시오 8세가 교회령의 과세를 둘러싸고 프랑스 왕과 대립하다가 분신자살한 사건도 일어났다. 이처럼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긑나면서 상업이 발달했고 대상인들이 탄생했으며 봉건주의의 기반인 장원제가 무너졌다. 교황권이 약해지고 왕권은 강화되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들이었다. 필립 3세 이후 교황청은 약 70년간이나 남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졌다. 훗날 교황청은 한때 로마에 돌아왔지만, 로마와 아비뇽의 두 곳에서 각각 교황이 즉위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들은 서로가 정통임을 주장하며 다투는 교회 대분열을 일으켰다. 그러나 종교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15세기 초반에 들어서서 로마의 교황청이 정통임을 인정받으며 대분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으로 면죄부를 판매한 교회와 교황 그리고 국왕까지 맹렬하게 비난했던 종교 개혁가이자 프라하 대학의 신학교수인 양 후스는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를 지지하는 체코의 민중들이 항거를 해 전쟁이 일어나는 등 혼란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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