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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사 상식 24) 티무르 제국과 오스만 제국
    세계사 상식 2023. 9. 22.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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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 제국의 재건을 꾀한 티무르

       1370년, 칭기즈 칸의 후손을 자처한 차가타이한국의 티무르는 1366년, 처남 후사인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서차가타이한국의 지배권을 장악했습니다. 그 후 테구르는 후사인마저 몰아낸 후 자신의 왕조를 확립했습니다. 그 후 구이란,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인 사마르칸트를 도읍으로 삼고, 이란 지역의 일한국을 정복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슬람 세계는 중앙아시아로 확산됐습니다. 그는 이슬람교에 기반을 둔 몽골제국의 재건에 힘써 차가타이한국이 전국을 통일하게 되었는데, 분열되어 있던 일한국을 병합하고 킵카츠한국의 일부도 손에 넣었습니다. 1392년에는 바그다드를 점령했으며 또한, 인도 북부를 지배하에 두어 맘루크 왕조로부터 시리아를 빼앗았습니다. 1402년에는 서아시아의 패권과 이슬람 세계의 종주권을 놓고 신흥 오스만 투르크와 앙카라에서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티무르가 오스만 투르크를 제압하여 서아시아를 세력하에 두고, 이어 명나라의 원정을 계획하지만 도중에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제3대 술탄인 샤르흐 시대에 티무르 제국은 정선기에 도달하여, 중국 명나라와 국교를 회복하여 오스만 제국과 화의를 맺어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4대 술탄인 울루그베그가 내란으로 암살당하고, 이후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하여 15세기 말에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극심함 내분과 칭기즈 칸의 후예가 세운 우즈베크한국의 샤이바니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사파비 왕조의 건국

       이란은 사라센 제국에 이어 셀주크 투르크, 일한국, 티무르 제국 등에서 오랫동안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1502년에 이루러 티무르 제국이 멸망한 후, 이란인의 민족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이 정권이 바로 이슬람 왕조인 사파비 왕조인데, 이스마일 1세에 의해 건국됐습니다. 사파비 왕조의 샤(국왕)인 이스마일은 자신을 이슬람의 초기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알리의 후손임을 내세워 이슬람교의 시아파를 국교로 삼았습니다. 알리의 후손만이 이슬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시아파의 교리에 따른 것입니다. 그 결과 수니파인 오스만 제국과 대립했습니다. 

       사파비 왕조는 제5대 국왕인 아바스 1세 때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를 몰아붙이고 타국에 빼앗긴 바그다드와 호르무즈 섬을 탈환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도 수도를 카즈빈에서 이스파한으로 옮기고 해상무역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아바스 1세는 162개의 화려한 건축 모스크를 세웠으며 50군데에 가까운 학교를 세웠습니다. 또한 공중목욕탕을 300개 가까이 지어 세계 일류 국가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아바스 1세 사후에 국내가 혼란에 빠져 쇠퇴하고, 결국 1736년에 멸망했습니다. 

     

     

    크리스트교에 침투한 이슬람 세력

       아나톨리아 북서부에 셀주크 투루크에 지배하에 있던 오구즈족의 오스만 1세가 1299년,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국호는 창건자의 이름을 따 오스만 투르크로 정해졌습니다. 오스만 1세는 1280년 오구즈족의 족장으로 선출된 뒤 동로마 제국, 몽골 등과 전쟁을 벌이며 주변 세력을 끌어모아 제국 건설의 야망을 키웠습니다. 오스만 쿠르크는 14세기 중반에 발칸반도에 상륙하면서 유럽으로의 첫걸음을 떼었습니다. 이후 제3대 술탄무라드 1세는 14세기 중후반 동로마의 아드리아노플을 함락시키고 이곳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제4대 술탄인 바예지드 1세는 1396년에 신성 로마 황제이자 헝가리 왕인 지기스문트가 지휘하는 발칸 크리스트교 연합군(프랑스, 영국, 독일)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격파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오스만 투르크는 1402년에 앙카라 전투에서 몽골 제국의 티무르에 패하고, 황제가 포로로 잡혀 죽으면서 세력이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국의 번영

       티무르가 중국 명나라 원정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 후 티무르 제국과 화의를 맺은 오스만 제국은 급속히 세력을 회복했습니다. 이후 1452년에 술탄 메메드 2세가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수도로 삼았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 제국에서 비잔틴 제국시대까지 약 100년간 외부로부터의 침공을 막아온 크리스트교의 중심지였습니다. 따라서 이슬람 세력의 점령은 크리스트교의 점령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이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데브쉬르메'라는 특유의 이민족 포용 정책을 썼습니다. 기독교 점령 지역마다 10세에서 20세 내외의 크리스트교 청년들을 징집한 후, 이슬람교도로 개종시켜 신군(예니체리)이나 공무원으로 키웠습니다. 이들은 용병이 아니라 오스만 투르크의 엘리트 집단이 되었으며, 콘스탄티노플 공격시 상비군의 핵심을 이루는 부대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동로마는 교황청을 통해 서유럽에 원군을 요청하지만 교회 통합이 무산된 교황청이 냉담한 반응을 보여 파멸하고 말았습니다. 1463년에, 오스만 투르크는 에게 해 연안의 섬들은 물론, 발칸반도의 세르비아 지역 대부분과 그리스까지 정복하고 이어 보스니아까지 합병했습니다. 

       그 후 오스만 투르크의 제9대 술탄 셀림 1세는 사파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를 지배했습니다. 1517년에는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켰습니다. 이때 망명 중이던 아바스 왕조 칼리프에게 칼리프의 지위를 양도받음으로써, 정치적 지도자인 술탄이 칼리프를 겸하는 술탄 칼리프제가 성립됐습니다. 제10대 술탄인 쉴레이만 1세는 오스만 투르크 사상 최고 군주로 평가받는 인물로 이 시기에 오스만 제국은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1538년의 프레베자 해전에서는 스페인과 베네치아 그리고 로마의 교황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격파하고 지중해 전역을 지배했습니다. 16세기 중반까지 끝없이 유럽으로 뻗어나가던 오스만 투르크는 1571년, 스페인과 맞서 싸우다 그리스의 레판토 앞바다에서 참패했습니다.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밀려난 오스만 투르크는 19세기 이르러 서구화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1876년에는 아시아 최초로 헌법을 제정했습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발칸의 신생 독립국 등과 벌인 발칸 전쟁에서 패배한 오스만 투르크는 1923년, 공화국으로 변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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