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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사 상식 28) 십자군의 탄생
    세계사 상식 2023. 9. 26.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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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군의 형성 배경

       11세기 무렵, 서유럽의 국가들 사이에서는 세력 확대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었다. 십자군 전쟁의 배경에는 동방 무역의 확대를 위한 이탈리아 각 도시의 동지중해 진출과 크리스트교의 국토 회복 운동의 고조, 더불어 유럽 사회 전체의 안정 상태가 깔려 있었다. 한편, 7세기 이후 크리스트교의 성지 예루살렘이 이슬람교도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성지 회복의 움직임도 고조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셀주크 황조가 아나톨리아를 침략했다. 수도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위기를 느낀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로마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우르바노 2세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비잔틴 제국 중심의 동방 종교회와 서유럽 중심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통일을 목표로 성지 회복을 호소했고 결국 십자군이 결성됐다. 

     

    서로 다른 목적으로 참가한 십자군

       십자군으로는 국왕과 제후, 기사, 상인, 농민 등이 동원됐다. 목적은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이지만, 사실 이 동원된 사람들의 참전 동기는 각자의 입장에 따라 크게 달랐다. 국왕과 제후 그리고 기사들은 영토를 확대하고 전리품을 얻기 위해, 상인들은 상업 거점을 확보하고 무역을 확대하기 위해 참가했다. 농민들은 부채를 탕감하고 농노 신분에서 해방되는 것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교황은 십자군의 성공에 따른 교황권의 절대화가 목적이었다. 

     

    십자군의 흐름

       십자군의 파견은 1096년에 제1차 원정이 이루어졌다. 이때 제1차 원정에 참여한 군인들이 학살과 약탈 등의 만행을 일삼아 성전의 이미지를 흐리고 말았다. 그 후 6번 더 십자군이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나서게 된다. 약 200년에 걸쳐 진행된 전쟁이었다. 제1차 원정에서는 프랑스의 제후와 기사들이 중심이 되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팔레스타인에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지만 셀주크 왕조의 반격에 부딪혔다. 예루살렘 왕국도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를 멸망시킨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에 의해 멸망했다.  제2차 원정은 내분으로 싸우기도 전에 패배했으며 제3차 십자군 원정에서는 영국 왕 리처드 1세, 프랑스 왕 필리프,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참가하여 아콘을 점령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가 물에 빠져 죽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리처드 1세가 살라딘에게 크리스트교 순례자의 안전을 약속받으면서 제3차 전쟁이 끝났다. 1202년, 제4차 원정에서는 베네치아의 라이벌이었던 셀주크 투르크에 점령당해 있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라틴 제국을 세웠다. 이는 베네치아 상인의 동방 무역 확대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 원정이었으며 본래 목적과는 무관했다. 제5차 원정의 카이로 공격도 본래 목적과는 차이가 있었고, 십자군 말기에는 세속적인 전쟁이 되고 말았다. 1291년에 이르러 십자군의 최후 거점이었던 아콘을 잃고 십자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십자군의 영향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에서 200년에 걸쳐 일어난 길고 지루한 전쟁에서 결국 이슬람교가 승리했다. 7차례의 십자군 전쟁은 유럽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성전 회복이라는 고귀한 목적으로 출발했던 원정의 실패로 인해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었고, 전쟁에 참여했던 제후와 기사는 거액의 지출과 전사로 몰락했다. 그러나 국왕들은 영지가 확대되고 권력이 강화되어 중앙집권화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십자군 원정은 교통 발달을 촉진하여 북이탈리아의 각 도시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상인들을 상당액의 돈을 벌었다. 여기에 프랑스의 각 도시가 가세하여 지중해 교역권과 북유럽 교역권이 형성되면서 화폐 경제가 발달했다. 화폐 경제의 발달은 이윽고 농노 해방과 장원의 해체를 가져왔다. 문화적으로는 이슬람 문화와 비잔틴 문화를 접하면서 고전과 과학 기술이 전해져, 훗날 르네상스의 길을 열었다. 

     

    십자군이 미친 영향

       사회의 구조로 보면 교황은 권위를 잃게 되었고, 제후와 기사는 거액의 지출과 전사로 몰락하였다. 반면 국왕은 영토를 확대하였고, 권력이 강화되어 중앙집권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교통로가 발달하여 북이탈리아의 도시가 발전하게 되면서 화폐 경제가 발전하게 된다. 그리하여 농노들은 해방을 하게 되고 장원제가 해체되었다. 문화적으로는 이슬람 문화와 비잔틴 문화에 접촉하게 되면서 고전과 과학 기술이 전해졌다. 그리하여 훗날 르네상스가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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