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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상식 25) 게르만족세계사 상식 2023. 9. 23. 17:54반응형
고대 게르만족
발트 해 연안에 사는 게르만족은 비옥한 토지와 환경을 찾아 드넓은 초원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기원 전후부터 각 부족의 통합과 재편을 추진하여, 수십 개의 부족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 부족 국가에서 왕과 수장은 군사와 종교상의 지도자였지만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최고 결정 기관은 자유민인 성인 남자가 참석하는 민회였습니다. 또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과 고용 관계를 맺어 충성을 맹세하는 종사제가 있었습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게르만인은 라인 강 동쪽에 진출하여 로마 제국과 인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3세기에는 도나우 강 하류 지역까지 퍼져, 인구 증가와 토지 부족으로 인해 용병이나 소작인으로서 로마 제국 내로 이주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게르만족의 건국
게르만 민족은 대표적으로 고트족, 롬바르드족, 프랑크족, 부르쿤트족 등 몇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375년, 흉노의 후예로 보이는 훈족이 흑해 북안의 동고트족 거주지에 침입하고, 이어 서고트족을 압박하자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됐습니다. 그들은 서유럽 각지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 대이동은 서로마 제국에도 영향을 미쳐, 결국 476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게르만인 용병대장에 의해 추방되었고, 이로써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습니다. 유목 민족이었던 게르만족은 인구 증가와 토지 부족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이동했지만 게르만 민족이 세운 국가는 상당수가 단명했습니다. 그러나 프랑크족의 프랑크 왕국은 다른 게르만 국가를 병합하고, 로마교회와의 결속을 강화하면서 힘을 키워나갔습니다. 이러한 대이동에 따라 민회나 종사제 등의 게르만적 요소와 로마 문화가 융합되어 중세 유럽 사회의 기초를 형성했습니다.
프랑크 왕국과 로마 가톨릭
로마 영토 안으로 들어간 게르만의 각 부족들이 그 지역에 정착해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486년 갈리아 지방에 메로빙거 가문의 클로비스가 프랑크 족을 통일했습니다. 이로써 클로비스는 갈리아 일대를 지배하게 되는 데 이곳에 메로빙거 왕조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프랑크 왕국의 시작입니다. 클로비스는 아내의 권유에 따라 당시 게르만인의 대다수가 믿고 있던 아리우스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게르만인으로서는 최초로 로마 가톨릭(아타나 시우스파)으로 개종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개종으로 프랑크 왕국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연대를 강화하며 영토를 확대했습니다.
그러나 580년 클로비스의 사후, 게르만의 전통대로 왕국은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고, 혈투 끝에 클로타르가 패권을 잡았습니다. 제2대 국왕이 된 클로타르 1세 역시 네 아들에게 왕국을 분할해 상속했습니다. 게르만 민족은 아들들에게 왕국을 분할 상속하는 게 전통이었습니다. 이런 분할 상속과 내분에 의해 프랑크 왕국은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클로타르 2세에 의해 프랑크 왕국이 가까스로 재통일 되지만 그 역시 왕국을 3등분한 뒤, 각 지역의 통치를 재상들에게 맡겨 다시 분열되는 사태를 맞았습니다. 이런 내분 속에서 대대로 행정과 재정의 수장을 지내던 궁재 카롤링거 가가 권력을 쥐었습니다. 그리고 732년, 우마이야 왕조의 이슬람군이 침입하자 궁재 카를 마르텔은 교회의 소유령을 몰수하고 가신에게 분배하여, 중장비 기사 부대를 편성했습니다. 이 기사 부대의 활약으로 이슬람 군대를 무찔러, 서구 크리스트교 세계를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했습니다.
피핀 3세와 카롤루스 대제
751년 명목만 유지해 오던 메로빙거 왕조는 재상인 피핀 3세가 국왕인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새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피핀은 카를 마르텔의 아들로 카롤링거 왕조를 세웠습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최고 권력자인 로마 교황의 요청에 따라 북 이탈리아의 롬바르드 왕국을 공격, 라벤나 당의 지역을 교황에게 바쳤습니다. 교황이 피핀을 프랑크 국왕으로 인정해 준 대가였습니다. 이것이 교황령의 시작이며 중세 가톨릭 교회의 경제적 기반이 됐습니다. 제2대 카롤루스 대제(샤를르마뉴)는 800년, 크리스마스 때,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서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황제의 제관을 받았습니다. 그는 모든 게르만 부족을 통합해 프랑크 영토를 최대한 넓힌 정복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제관을 받는다는 건 서로마 제국의 재건과 교황의 동로마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며, 나아가 서유럽 세계의 탄생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카롤루스 대제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점령한 땅을 반환하고 그 대가로 동로마황제로부터 황제권을 승인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비잔틴 제국과 프랑크 왕국 즉,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은 정치적으로 대등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의 흥망
카롤루스 대제 때 프랑크 왕국은 전국을 약 300주로 나누었습니다. 그는 각지에 관리를 보낼 때 2명 1조로 보냈는데, 한 명은 행정관이고 한 명은 성직자였습니다. 카롤루스 대제는 포교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파견된 행정관은 그라프라고 불렸습니다. 카롤루스 대제는 그라프를 감독하기 위해 국왕 직속의 순찰사 제도를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기병군단을 조직해 군력을 강화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로서 사교 등 성직자의 임명권을 쥐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교육 제도를 개혁하고 라틴 문화를 보급, 계승했습니다. 이를 '카롤링거 르네상스'라 하며, 이를 통해 로마와 게르만 그리고 크리스트교 문화가 융합된 유럽 문화의 기초가 확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과 사업은 카롤루스 대제 1대만에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죽자 그의 정책과 사업은 급속하게 쇠퇴했고 프랑크 왕국은 그와 함께 수그러들었습니다. 게다가 제3대 국왕 루트비히 1세가 죽으면서 프랑크의 전통 유언대로 아들들에게 영토를 분할했습니다. 그렇게 분할된 프랑크 왕국은 843년의 '베르딘 조약'으로 셋으로 분열되었습니다. 그 후 870년에 '메르센 조약'으로 인해 동프랑크 왕국와 서프랑크 왕국 그리고 이탈리아 왕국으로 다시 분할되었는데, 현재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지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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