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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상식 26) 중세유럽의 봉건제도세계사 상식 2023. 9. 24. 18:26반응형
유럽 봉건제도의 성립
중세 유럽을 지탱해 온 이념은 봉건주의였습니다. 받은 토지를 매개로 주종 관계를 형성하는 유럽의 봉건제는 왕과 신하의 개인적인 예약에 기초했습니다. 혈연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던 중국의 봉건제도와는 달랐습니다. 이 주종 관계의 기원은 게르만족의 종사제와 왕이 신하에게 토지를 주어 보호하면 신하는 군사적인 봉사를 하는 로마 말기의 은대지 제도에 있습니다. 이러한 주종 관계는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 시대부터 세습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나아가 인구가 많아지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국왕에서 제후로, 제후에서 다시 기사로, 다시 농민으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형태의 계층사회를 형성하는 통치 이념이 되기도 했습니다.
봉건 사회의 인적 구성을 비유적으로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 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각각 성직자, 기사, 농민을 가리킵니다. 사회 구조가 낳은 무거운 짐은 최하층인 농민이 모두 부담하였습니다.
봉토를 지배했던 왕, 제후, 기사 등의 영주는 자신의 봉토에 대한 과세권 및 재판, 경찰권을 가짐과 동시에 주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또한 왕을 제외한 영주는 국왕에 대한 공납(수확의 일부를 지대로서 바침)의 면제와 국왕의 관리가 봉토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한 불수불입권을 통하여 권력을 강화해 갔습니다. 봉토는 장원이라 불리며, 이러한 대토지 소유 제도를 장원제라고 합니다.
장원 내에는 장관을 중심으로 제빵소, 대장간, 제분소, 농노의 촌락, 영주의 직영지, 목초지 등이 있었습니다. 장원에 거주하는 농민은 '반은 노예, 반은 농민' 이란 의미로 농노라 불리며 이동의 자유가 없고, 세금으로 부역/공납/인두세/혼인세/수차 및 제빵소의 사용료/사망세 외에 봉사 의무 등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교회에도 십일조로 수입의 10%를 내야 했습니다.
이 무렵 바퀴 달린 철 쟁기를 이용한, 삼포식 농업(농지를 춘경지, 추경지, 휴경지 셋으로 나누어 차례대로 경작하는 농법)이라고 불리는 획기적인 농경법이 개발되어, 농작물의 생산량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황제보다 강력한 로마의 황제
로마 가톨릭 교회
가톨릭은 '보편적인, 일반적인' 이라는 뜻으로 4~5세기에 걸쳐 서유럽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확산되었습니다. 이후 교황에서부터 사제에 이르는 계층 체계가 확립됐습니다. 그들은 봉건제도가 성립하면서 왕국으로부터 토지와 재산을 기부 받아 광대한 장원을 소유한 영주가 되었고, 본분인 신앙생활 대신 세속적인 생활을 영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성직자가 타락하기 시작해 성직을 사고파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자와 결혼해 아이들을 낳는 등 끝없이 세속에 관심을 갖는가 하면 심지어 성직을 세습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10세기에 이를 비난하는 수도원 개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원래 금욕 생활을 하는 수도사가 신에게 기도하는 장소인 수도원에 529년에 이탈리아인 베네딕투스가 창립한 이후 여러 곳에 세워졌습니다. 일부 수도원은 교회와 마찬가지로 타락하고 있었습니다. 10세기에 이르러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와 수도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은 베네딕투스 회칙으로 회귀할 것을 강령으로 삼았습니다.
교황권의 확립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 매매, 성직 세습 등을 금하고, 성직자의 서임권을 교황이 갖도록 했습니다. 이를 위해, 교황은 당시 교회를 이용하여 봉건 제후를 통제하고 있었던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와 성직서 임권을 둘러싸고 대립했고, 결국 하인리히 4세는 교회에서 파문당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파문당하는 것은 황제의 지위마저 위험해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교황과 황제간의 대립은 이미 오래 전부터 빚어졌던 일이었습니다. 사실 이탈리아 통치권을 놓고 동로마황제와 그레고리우스 2세가 대립하는 등 교황과 황제의 갈등은 어제, 오늘의 아니었습니다.
하인리히 4세가 파문당한 사건에 대해 대부분의 주교들은 물론 귀족들까지도 교황편이 되어 버리자 그는 사면초가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의 카노사에서 교황에게 사죄했습니다. 1077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카노사의 굴욕'이라 하는데, 교황의 절대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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