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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사 상식 18) 명나라와 청나라
    세계사 상식 2023. 9. 13.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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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의 건국

       원을 몰아낸 홍건군의 주원장은 1368년, 수도를 남경으로 옮겨 명을 건국했습니다. 주원장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타고난 관용과 지도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원의 수도로 진격했을 때 원의 마지막 황제 토곤 테무르는 무력 저항을 피했습니다. 무혈 입성을 한 것입니다. 명의 초대 황제인 홍무제가 된 주원장은 그 후 당과 송의 법률을 이은 "대명률" 이라는 법전을 제정, 반포했습니다. 그가 직접 감독을 했는데, 그는 탐관오리와 부패한 조세 제도의 개혁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그렇게 홍무제는 황제의 권한을 강화했습니다. 명은 강남에서 형성된 첫 통일 국가로, 강남의 높은 경제력이 나라를 지탱했습니다. 

       홍무제 주원장은 유학을 국시로 부활시켰습니다. 주자학을 중심으로 과거제를 도입했고, 징세의 일환으로 전국적으로 호구 조사도 철저히 했습니다. 농민 한 명 한 명을 파악하기 위해 토지대장인 '어린도책' 과 징세대장인 '부역황책' 을 작성하여 세금 징수를 철저히 했습니다. 탈세가 줄어들고 명의 재정이 튼실해 진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명의 번영과 해외 원정

       홍무제는 죽기 전 자신의 후계자로 아들인 주체를 삼지 않고 조카를 삼았습니다. 주체는 아버지인 홍무제를 도운 일등공신임에도 조카에게 황위를 넘기게 된 것입니다. 주체는 황위에서 밀려나 변방의 책임자로 좌천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주체는 1399년, 수만 명의 장병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명의 2대 황제인 건문제를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결국 1402년, 명의 황위를 찬탈한 주체는 영락제가 되었습니다. 

       영락제는 강남 지방의 경제와 경제가 취약한 화북 지방의 경제를 통합시켰습니다. 수도를 북경으로 정한 후 그는 적극적으로 대외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동해안으로 시작된 남해 원정 결과 남방의 30여개 나라가 조공 무역을 위해 찾아오도록 만들었습니다. 또한 총 길이 2,400킬로미터의 만리장성을 보수하여 북방 몽골족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그러나 영락제 이후, 명은 환관의 대두와 북로남왜의 출현으로 국력이 약해져갔습니다. '북로'란 북방의 타타르 부족과 오이라트 부족을 말하고, '남왜'란 중국 동남해안을 어지럽힌 일본의 해적 및 상인 집단이었습니다. 

     

    여진족이 세운 청

       숙신 혹은 말갈이나 여진족으로 불리던 만주족이 12세기 금나라 이후 두 번째인 후금 건국했습니다. 1616년의 일이었습니다. 후금은 국가명에서도 알 수 있듯 금 왕조의 후예입니다. 후금의 초대 황제로 즉위한 누르하치는 행정, 사회 조직이기도 한 '팔기군제' 를 조직하여 군제를 정비했습니다. 팔기군제란 1601년, 누르하치가 조직한 기병 군단으로 황, 홍, 백, 남색으로 4개의 기병이었으며, 이들을 '니루'라고 불렀습니다. 누르하치의 점령지가 넓어지며 이 4부대에서 8부대로 늘어나 팔기군이 되었습니다. 팔기군은 평소엔 농업 등의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시에는 즉각 군인으로 편송되는 부대였습니다. 제2대 홍타이지에 이르러 내몽골을 병합하여 국호를 청으로 고쳐(1636년), 청나라가 되었습니다. 군사 지도자이기도 했던 홍타이지에 의해 내몽골과 조선을 정벌해 내몽골에서는 병력과 말을, 조선에서는 식량과 재정을 조공으로 받아 명나라 정벌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명의 멸망과 청의 중국 지배

       16세기 명의 북쪽의 후금 즉, 청나라와 남쪽의 왜구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6세기 후반에 수상격인 장거정의 개혁으로 잠시 재정이 회복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입으로 인해 이를 도우러 나섰던 명은 또  다시 재정이 궁핍해졌습니다. 관료들의 당쟁도 거듭됐으며 17세기 초반에 이르러서는 악덕 환관들과 탐관오리들의 세금 포탈 등으로 도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성서 지방의 역참 원인 이자성도 농민 반란을 일으켰고, 1644년 명의 수도 북경을 점령하면서 사실상 명은 멸망했습니다. 이는 청나라에게 좋은 기회였습니다. 내분에 의해 명이 멸망하는 바람에 중원에 통일 국가를 세우려던 청에게는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 된 것입니다. 청은 제3대 순치제 때 명이 멸망한 틈을 타, 명의 무장 오삼계의 안내로 북경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오삼계는 북경을 점령한 이자성과 청국을 두고 저울질하다가 청국 쪽으로 기울어진 명의 장군이었습니다. 그 뒤 청은 이자성을 물리치고 중국 지배자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윽고 제4대 강희제 때는 반란을 일으킨 오삼계 등의 유력 무장을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대만에서 저항을 계속하던 명의 옛 신하 정성공의 일족을 멸족시키고 드디어 중국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강희제는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국경을 확정했습니다. 이후 제5대 옹정제, 제6대 건륭제에 걸친 130년간의 청의 전성기가 이어집니다. 

       청은 만주족 국가이면서도 한족 식으로 과거를 치렀고, 중앙 관청의 요직에 만주인과 한인을 같은 수로 배치하는 '만한우수관제'를 도입함으로써 한족의 불만을 해소했습니다. 제2대 황제 홍타이지가 나라 이름을 청으로 정한 것은 명나라로 진군해서 중화 전통을 잇겠다는 의지였습니다.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의 마음을 달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족에 대한 억압책으로 만주족의 풍습인 변발을 강요했고, 청에 비판적인 인물과 학문을 탄압했습니다. 이렇게 회유책과 억압책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한족을 효율적으로 지배했습니다. 

     

    명과 청의 경제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의 경제는 은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5세기 중반 이후 외국의 은이 유통과 함께 해외와의 교역량이 많아지면서 유럽의 문화가 흘러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문에 16세기 후반에는 각종 세금을 은으로 납부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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