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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사 상식 17) 아, 몽골! 그 폭풍같은 100년
    세계사 상식 2023. 9. 13.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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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기즈 칸의 몽골 제국

       몽골인은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의 대표적인 기마 유목 민족의 하나입니다. 1206년, 요가 멸망한 뒤 몽골 고원에서 유목 민족 몽골족의 테무친이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부족장 회의에서 칸(군주)이 되어 칭기즈 칸(태조)의 존칭을 받았습니다. 그가 세운 나라가 몽골 제국이었습니다.

       몽골은 같은 몽골계인 거란족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란족이 금과 송에 의해 멸망한 뒤 한때 카불 칸이 몽골 부족을 통일했습니다. 이 카불 칸의 손자가 테무친의 아버지인 예수게이였습니다. 그가 정적에게  독살 당한 뒤 테무친은 강건한 육체와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칭기즈 칸은 몽골 통일 뒤, 천 호나 백 호 단위로 조직하는 독특한 군사 및 정치 조직을 창설했습니다. 그의 군대는 말의 기동력을 이용한 강력한 군단으로 조직되었습니다. 몽골 제국이 장기간에 걸쳐 번영을 누리려면 농경 민족을 지배하에 두고 동서 교역을 통해 이익을 확보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한 칭기즈 칸은 금나라를 공격하는 한편, 비단길 교역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칭기즈 칸이 금을 공격해 중국 북경을 점령했을 때 금 왕조의 관리로 있던 요 왕족 중 한 명인 야율초재를 만났습니다. 그는 천문은 물론 지리, 역사, 의학 등 여러 학문에 뛰어났습니다. 칭기즈 칸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신하로 삼아 몽골의 정치, 경제적 기반을 굳혔습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비단길을 통해 교역을 하고 있던 호라즘 왕조(이란)를 무너뜨리고, 서북 인도와 남러시아에도 진출합니다. 나아가 서하도 멸망시켰습니다. 

       칭기즈 칸은 저항하는 민족과 도시의 주민 대부분을 학살하여 결국 여러 도시가 폐허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그는 아버지인 예수게이의 살해를 사주했던 금나라를 공격해 금의 수도였던 연경(북경)을 모두 불태워 금의 문화마저 문명 이전으로 돌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주민을 학살했습니다. 복수의 의미도 있었지만 유목 민족에게 도시가 필요 없었던 탓도 있었습니다.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가는 곳마다 승리했습니다. 그들은 어느 곳을 가나 잔인하게 살육하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칭기즈 칸이 야율초재의 충언을 받아들인 이후에야 그는 전쟁과 대살육을 마감했습니다. 칭기즈 칸은 1227년, 서하 원정 중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나이 64세였습니다.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는 덕망이 높고 용맹한 인물이었습니다. 칭기즈 칸의 맏아들인 주치가 서아시아 원정 중 사망해 그가 제2대 칸이 되었습니다. 그는 카라코룸을 도읍으로 삼고 금을 완전히 멸망시킨 뒤, 태조의 손자인 바투에게 서방 원정을 명했습니다. 바투는 남러시아에서 헝가리로 진입하여, 1241년 발슈타트 전투에서 독일과 폴란드의 연합군을 무찔렀습니다. 제4대 몽케 칸은 동생 훌라구를 서아시아로, 쿠빌리아를 남아시아로 보냈습니다. 훌라구는 바그다드를 점령하여 아바스 왕조를 제압했고, 쿠빌라이는 티베트와 다리를 정복했습니다. 또한 한반도의 고려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했습니다. 몽골 제국은 유럽에서 아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발전했습니다. 칭기즈 칸은 40여 나라를 짓밟아 멸망시킨 역사상 최대의 정복자였습니다. 

     

    몽골의 분열과 원의 건국

       제5대 쿠빌라이 칸이 즉위하여 수도를 대도(현재의 베이징)로 옮기자 오고타이 칸의 손자인 바투가 반발하여 '바투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35년 가까이 계속된 반란으로 인해 칭기즈 칸 이후 틀이 잡혀가던 몽골 제국은 정치적으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남송 정벌을 끝낸 제5대 쿠빌라이는 1271년에 이르러 중국식 국호인 '대원' 을 채택해 원나라를 세웠습니다.

       칭기즈 칸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및 인도 원정에서 귀국한 뒤 그의 광대한 영지를 세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장남인 주치에게는 킵차크한국이 되는 남러시아 초원을, 차남인 차가타이에게는 훗날 차가타이한국이 되는 중앙아시라를, 삼남인 오고타이에게는 훗날 오고타이한국이 되는 알타이 평원을 주었습니다. 

       중국 대륙을 통일한 쿠빌라이는 칭기즈 칸의 막내아들인 툴루이의 아들입니다. 몽골 전통에 따라 몽골 고원은 칭기즈 칸 사후 막내아들이 물려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툴루이가 제2대 칸이 된 오고타이에게 몽골 고원을 넘겨준 것입니다. 몽골의 장래를 생각한 툴루이의 순수한 애국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툴루이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몽골 고원을 오고타이에게 넘겨주는 바람에 그들에게 돌아갈 토지와 재산이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세 아들 중 하나가 바로 쿠빌라이였습니다. 그들 형제들은 자신들 중에 반드시 칸이 나와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결국 툴루이의 아들들이 칸이 되면서 몽골 제국은 반란과 분열을 겪게 되었습니다. 

       원나라에 대한 쿠빌라이의 종주권을 부정한 오고타이한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 있는 차가타이한국, 장남인 주치에게는 킵차크한국, 일한국 등 다섯 나라가 분립되면서 서로 칸이라 칭했고, 그것을 부정하는 반란이 일어났으며 그걸 진압하는 전쟁 또한 일어났습니다. 

       칭기즈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가 세운 원나라는 명나라를 세운 홍건군의 주원장에 의해 수도가 함락됐습니다. 이로써 1368년의 일로 원나라의 중국 지배는 90년만에 끝을 맺었습니다. 그 뒤 몽골 제국은 차가타이한국의 귀족이며 칭기즈 칸의 후손을 자처하는 티무르에 의해 재통일을 이뤘습니다. 

     

    원나라의 발전과 몰락

       원나라 시절 최고의 극작가로 알려진 인물은 관한경이었습니다. 몽골이 세운 원나라는 몽골인만을 우대하고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을 경시해 백성의 불만은 날로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관한경은 한족의 선비였고 그랬기 때문에 출세를 포기하고 극작가로 나섰던 것입니다. 

       원 제국은 몽골인을 국종, 투르크인이나 이란 유럽인을 색목인, 한족인 화북 쪽의 백성을 한인, 또한 한족인 강남 지방의 백성을 남인이라고 부르며 차별했습니다. 원 제국은 소수의 몽골인이 권력을 독점하는 몽골 제일 주의를 채택했던 것입니다. 결국 한족은 하층민으로 전락했습니다. 즉, 관한경의 선택은 시대의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수호전' 이나 '서유기', '삼국지' 등의 구전 소설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출세가 불가능했던 한족의 선비들이 대중 문학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결국 한족의 평민은 물론 지식인의 불만도 커져갔습니다. 

       제5대 원 제국의 황제인 쿠빌라이의 사후, 제위 계승 다툼과 라마교 보호로 인해 원의 재정은 바닥이 났습니다.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원나라는 '대원통보' 라는 동전을 발행했습니다. 쿠빌라이 이후 원나라는 외국과의 무역을 제외하고는 국내에서는 교초(지폐)를 사용헸습니다. 그러니 이 교초를 남발한 탓에 물가가 올라 경제적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불안 속에서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연이어 터졌고, 1251년에는 원의 타도를 목표로 백령교도를 중심으로 '홍건적의 난' 이 일어났습니다. 이 난을 이끈 수령 중 한 명이자 한족의 선비였던 주원장이 원군을 물리치면서 원은 몽골 초원으로 돌아가고 명나라가 새롭게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원 제국은 교통망의 발달로 동서 세계의 문화 교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동서 교역로가 활짝 열려 원의 도시들은 유례없이 번창을 이루었습니다.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가 색목인으로 제5대 황제인 쿠빌라이 밑에서 관리로 일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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