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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상식 16) 국제적인 문화의 당나라 그리고 멸망세계사 상식 2023. 9. 13. 18:11반응형
당 문화
당의 문화는 수의 앙제에 의해 완성된 대운하와 남북조의 통일로 화북과 강남의 문화가 융합되어 나타났습니다. 당에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이슬람 제국과의 교류로 서방의 문화도 전해져 국제적인 색채가 짙은 문화가 탄생했습니다. 수도 장안에는 아시아 각지의 상인과 유학생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전성기 때의 장안은 세계 최대 규모인 인구 100만의 도시로 번창했습니다.
당의 종교는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이슬람교, 경교 등이 전해졌습니다. 불교 또한 융성해 인도를 다녀온 삼장법사 현장이 "대당서역기" 를 저술했고, 인도를 다녀온 의정이 "남해기귀내법자"를 저술했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불교 경전으로 인해 교리의 연구가 눈에 띄게 진전됐고, 유학 승려들을 통하여 한국과 일본에도 전해졌습니다.
당 시절 문학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성장을 했습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히는 시선이라고 부리는 이백(우리에게는 이태백으로 더 잘 알려짐)과 시성이라고 불리는 두보가 활동하여 중국이 세계 문학사에 자신만만하게 드러낼 수 있는 문학이 탄생하였습니다.
당의 주변 국가
당시 신라와 당은 한반도 분할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당나라의 야심에 반기들 들고 일어선 신라는 동맹을 깨고 대적했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통해 중국 문화를 흡수하기도 하고 직접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배워오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백제 멸망 당시 백제에 수군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한편, 중국 동북 지방에는 8~9세기에 고구려 귀족에 의해 세워진 발해가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발해는 당의 제도를 도입했고 일본과도 교류가 있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티베트는 7세기 초에 통일되어 당의 절도사가 일으킨 안록산의 난을 틈타 한때 장안을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북송의 통일 시대
당의 멸망
문화와 경제에 있어 태평성대를 누리던 당의 전성기에 현종은 정사를 멀리하고 양귀비만 총애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재상인 양국충 등 양씨 일족을 중용했습니다. 안록산도 그중 한 명입니다. 소그드인 아버지를 둔 안록산은 세 지방의 절도사를 겸하며 세력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양국충과 대립하여, 755년 부하인 사사명과 함께 '안록산의 난' 을 일으켜 장안을 점령했습니다. 현종은 사천으로 피난하던 도중 양귀비를 처형하고 자신도 퇴위했습니다.
당은 일단 난을 진압했지만 농미들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나눠주자던 균전제는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일부 관료와 지주, 호족들이 각종 편법을 써서 농민들의 토지를 소유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균전제는 자연스럽게 붕괴했습니다. 이 무렵 장안 밖의 절도사들이 독립적인 움직임을 강화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주민을 현 거주지에 등록하고, 재산에 따라 여름과 가을, 두 번 세금을 물리는 양세법이 실시되었습니다.
현종 말년에 다가갈수록 당에 대한 절도사의 통제력이 약해졌고, 환관들이 득세했습니다. 그들은 군사 대권을 장악해 급기야 황위 계승 문제까지 좌지우지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기아로 인한 혼란까지 발생했으며, 875년에는 소금 밀매상인 황소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은 농민을 중심으로 거의 전국으로 확대됐습니다. '황소의 난'은 절도사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황소군에서 당에 항복하고 절도사가 된 주전충이 907년, 당을 멸망시키고 후양을 건국했습니다. 당 건립 뒤 290년만의 멸망이었습니다. 이후, 후당, 후진, 후한, 후주가 단명 속에서 교체되었고, 지방에서도 10여개의 나라가 흥망을 거듭했는데, 이 시기를 5대10국 시대라 합니다.
송의 중국 통일
당이 멸망한 후 중국에는 절도사들이 자립해 나라를 세우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절도사 중의 한 명인 후주의 무장 조광윤은 후주를 멸망시키고 960년에 송을 건국했습니다. 그는 다른 절도사로부터 군사, 행정권을 빼앗았으며 황제 직속군을 강화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을 시도했습니다. 또, 문치주의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해마다 과거로 뽑힌 관료를 등용하여 유용하게 관리했으며, 황제가 직접 과거 시험을 주관하기도 했습니다. 이 중에서도 문관을 우대하고 학문을 장려했으며, 과거 시험을 통해 관리가된 문관들을 발탁했습니다. 문치주의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터라 송나라 초기 조정은 무인 세력을 억압했습니다. 이러한 관료는 대다수가 신흥 지주층 출신이었습니다.
북송의 멸망
송은 이민족 국가인 요와 서하에 대한 군사비 증가로 재정난과 사회적 동요가 심각해졌습니다. 소수의 대지주나 권력자들이 세금 납부를 회피하거나 탈세를 일삼아 결과적으로 북송의 재정난이 심각해진 것입니다. 따라서 개혁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1067년, 송의 제6대 황제인 신종은 신하인 왕안석의 제안을 받아들여 '신법'을 실시, 자작농과 중소 상공인을 보호하고, 재원을 확보하는 한편, 군사력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즉, 신법을 통해 송의 재정난을 해결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왕안석의 이 신법은 대지주와 대상인이 일정 부분의 기득권을 포기해야만 성립되는 것입니다. 즉, 신법의 근간은 농민과 작은 상인들의 경제적 지위 향상에 두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히 대지주 및 대상인들은 이 개혁을 반대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대지주나 대상인들이 농민이나 소상인들을 상대로 돈을 고리로 빌려 주었는데, 조정에서는 파격적인 저리로 대신 빌려 주는 개혁안인 '청묘법' 과 '시역법' 을 감행했습니다. 이에 더해 대지주나 상인, 귀족들의 탈세를 막고자 매년 '방전균세법'을 통해 토지 조사까지 실시했습니다. 대지주나 대상인들의 탈세를 막고 송나라 재정을 탄탄하게 하기 위한 개혁이었던 것입니다. 신종의 이러한 정책에 농민들이나 중소 상인들은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습니다.
남송 시대가 열리다
12세기에 이르러 금이 남하했습니다. 금은 남북조 시대에는 물길, 당시대에는 말갈이라고 불려온 만주 퉁구스계의 유목민인 여진족이 세운 나라였습니다. 1115년, 완안부의 족장인 아골타는 요나라에서 독립해 만주 회녕에서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대금'이라고 정했습니다. 이후 금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의 수도인 개봉에 쳐들어와, 결국 송은 1127년에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송은 중국의 역대 왕주 중에 가장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 왕조였습니다. 왕안석의 신법 채택으로 재정이 늘어나나 호화로운 건물을 세웠고 화원을 육성하기도 했습니다. 송의 멸망은 송의 문화적 사치로 재정이 파탄에 이르러 상대적으로 군사비 지출이 부족했던 원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송 황제 휘종의 아들, 고종은 강남의 임안(항주)으로 도읍을 옮겨 송을 재건했습니다. 이를 남송이라 한다. 그 후 남송은 금과 강화를 맺고 조공을 했습니다. 남송에서는 벼, 차, 뽕나무 재배가 보급되어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었고, 천주, 광주를 중심으로 남해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진 덕에 재정이 지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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