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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상식 20) 실크로드 - 동과 서를 잇는 길세계사 상식 2023. 9. 13. 19:54반응형
초원길 (스텝루트)
남러시아와 동유럽에서 키르기스 초원을 지나고 알타이 산맥과 몽골 고원을 거쳐 중국에 다다르는,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가장 오래된 길인 초원길은 주로 기마 유목 민족이 이용했습니다. 이 초원길을 통해 동서 문화가 교류되었던 것입니다. 기원전 6세기 ~ 기원전 3세기에 정교한 금세공과 청동기로 대표되는 스키타이인의 문화가 이 루트를 통해서 동에 전해졌습니다. 또한 흉노, 돌궐, 위구르, 몽골 등 다른 여러 민족도 이 루트에서 활약했습니다. 특히 13세기 몽골군의 러시아와 동유럽 대원정 역시 이 루트를 이용한 것입니다. 19세기 시베리아 철도의 개통으로 초원길은 쇠퇴했습니다.
비단길(실크로드)
기원전 130년경, 장건은 전한의 무제 시절 100여 명의 수하를 데리고 그때까지 미지의 세계로 알려져 있던 서역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흉노족에게 잡혀 고생하다가 가까스로 탈출, 남쪽의 타클라마칸 사막과 북쪽의 텐산 산맥이 동서로 연이어 달리는 길을 따라 13년 만에 서역에서 돌아왔습니다. 그가 다녀온 길은 곧 동서양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비단길입니다. 이 길은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도시를 경유하여 파미르 고원, 이란 고원을 넘은 후 메소포타미아, 시리아를 거쳐 지중해에 이르는 루트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국산 비단이 유럽으로 운반되었기 때문에 비단길이라고 불립니다. 이 루트는 경제적 가치가 높고 많은 이익을 낳았기 때문에 여러 민족이 그 지배권을 놓고 항쟁을 벌였습니다.
기원전 4세기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동양 정벌을 위해 비단길을 이용했으며, 서양의 페르시아와 헬레니즘 문화가 이 길을 통해 동방에 전해졌습니다. 또한 화약, 나침반, 인쇄술의 송대 3대 발명품이 서쪽으로 전해진 것도 이 루트를 통해서였습니다. 이외에도 후한의 반초가 인도의 쿠샨 왕조와 전투를 벌이는 등,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동서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게다가 동진의 승려 법현과 당의 승려 현장도 이 루트를 통해서 인도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해상 무역 및 해상 진출이 진행됨에 따라, 물건을 대량으로 빠르게 운반할 수 있는 바닷길의 중요성이 증가하여, 비단길은 쇠퇴했습니다.
초기의 바닷길
홍해와 아라비아 해, 인도양 연안을 경유하고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에서 인도차이나 반도를 따라 남중국해를 통과, 중국 남부에까지 닿는 바닷길은 이슬람 상인의 활약에 의해 8세기 무렵부터 동서를 잇는 중요한 교역 루트가 됐습니다. 기원전 2세기, 중국 전한의 무제 시대에 중국은 바닷길을 통해 동남아시아 각국은 물론 인도 동연안의 여러 나라와 교역을 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중국은 물론 근방의 나라들과 서방의 그리스/로마는 인도를 가운데 두고 간접적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동진의 승려 법현은 인도에서 돌아오는 길로 바닷길을 이용했고, 당의 승려 의정은 바닷길을 이용하여 인도를 왕복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6세기의 사산조 페르시아의 전성기에는 페르시아인이 바닷길을 통해 동남아시아를 왕래했습니다.
바닷길과 무슬림
8세기 무렵, 세계 최대의 제국을 세웠던 이슬람, 그들의 힘은 해군에 있었습니다. 이슬람 해군은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비잔틴 제국을 무찌르고 지중해로 진출했습니다. 그들은 인더스 강 전역을 점령하는가 하면, 북아프리카와 중국이 버티고 있는 중앙아시아, 나아가 유럽 제국까지 그 세력을 확장시켰습니다. 이런 이슬람의 영토 확장에 힘입어 이슬람 상인들이 뱃길을 타고 동서를 오가며 활약했습니다. 인도양에서는 이슬람계 페르시아인과 아랍인 상인이 활약했으며, 이후 이슬람 상인이 동서교역의 상업 활동에 뛰어들어, 이내 그 주도권을 이슬람 상인이 쥐게 됐습니다. 그들은 인도 서해안은 물론 실론과 말레이 반도 그리고 베트남 연안 각지에 상업 거점을 마련했습니다. 이슬람 상인은 중국의 광주, 항주, 양주 등에 체류하며 많은 도시에 '청진사'라 불리는 이슬람 사원을 세웠습니다. 이슬람의 수도 바그다드는 아프리카, 아시아 북유럽 등지로부터 뱃길을 이용해 들어오는 물자들의 집산지가 되었습니다. 바닷길은 이슬람 제국의 번영을 닦아 준 루트였습니다.
동서의 길을 연 모험가들
기원전 110년경의 중국 진나라. 진 무제 시절 부하 100명을 데리고 동서 문물의 통로가 된 중국쪽 관문인 옥문관을 나서는 이가 있었다. 바로 '장건'이었습니다. 그는 13년이 흐른 뒤 부하 1명과 처자만 데리고 귀환했습니다. 귀환하자마자 그는 진 무제를 만나 자신이 취득한 서역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보고했습니다. 서역에 중국만큼 거대한 국가들이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중국과 교역을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진 무제는 물론 휘하 신하들과 백성들까지도 놀라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장건에 의해 동양과 서양을 잇는 길이 비로소 뚫린 것입니다.
서기 70년경의 후한. 황제는 서역의 통제가 어렵다며 서역의 통치를 포기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반초'라는 장군은 서역 36국을 장악하는 것은 후한을 늘 위협하는 흉노의 오른팔을 자르는 것이라며 황제를 설득, 서역의 국가들을 정복해 나갔습니다. 그는 본국의 지원 없이 정복한 지역의 병사들을 징집해 다시 다른 서역국을 정복해 나가는 방식으로 성공했습니다. 본국 신하들이 원정군은 유지 비용이 많이 든다고 반대했을 때 반초는 자신이 정복한 서역국의 경작지에서 군비를 해결했습니다. 서역의 36국을 점령한 반초에 의해 비단길은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던 것입니다.
13세기에 동방 무역으로 번창했던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는 1270년 16세의 나이로 동방 여행을 떠나, 1275년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에 도착했습니다. 한족보다는 색목인을 우대했던 원나라의 통치 이념에 따라 마르코 폴로와 그의 아버지와 숙부는 이후 17년간 쿠빌라이의 신하로 있었으며, 마르코는 그동안 양주 지방의 총독을 역임했습니다.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 후 귀국한 그는 1298년의 제노바 전투에 패배하여 포로가 됐습니다. 감옥에서 같은 방을 쓴 작가 루스티켈로가 마르코의 26년에 걸친 대여행의 구술로 기록하여 "동방견문록" 으로 정리했습니다. 한편, 모로코 출신의 아랍인 이븐 바투타는 1325년 22세의 나이로 여행을 떠나, 이집트에서 소아시아, 인도를 거쳐 천주에서 대도에 도착하여 1349년에 귀국했습니다. 실로 24년에 걸친 대여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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