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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상식 22) 아라비아인 제일주의세계사 상식 2023. 9. 19. 18:16반응형
아랍제국 - 정통 칼리프 시대
알라의 사도의 대리자란 뜻의 칼리프는 무함마드 사후 혼란이 일어나자 선거를 통해 선출했습니다. 초대 칼리프인 아부바르크는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했고, 제2대 칼리프인 우마르는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며,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빼앗고 이집트까지 점령했습니다. 제3대 칼리프인 오스만은 친척을 중용한 실수로 암살당하지만 651년에 1200년 역사의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킵니다. 또한 646년에 알라의 계시인 이슬람의 경전 "코란"이 완성됩니다. 그 뒤를 이어 제4대 칼리프인 알리가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알리 칼리프 시대에 칼리프 선서 문제로 분쟁이 발생해 옴미아드가의 무아위야는 무력으로 칼리프 자리를 차지한 후세습 칼리프 제도를 세웠습니다. 여기서 초대 칼리프에서 제4대 칼리프까지를 정통 칼리프 시대라고 합니다. 도한 아랍인의 지하드(성전)는 일종의 민족 이동으로, 토지와 교역로의 확보가 목적이었으며 지하드 참가는 무슬림으로서의 의무였습니다. 정통 칼리프 시대에 이슬람은 모든 부족이 통합되었습니다. 이로써 경전의 통일이 이루어졌지만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이슬람 신앙의 동요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우마이야 왕조의 성립과 아랍 제국의 발전
우마이야가 출신이지 시리아 총독인 무아위야는 4대 칼리프이자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를 쓰러뜨리고 661년에 우마이야 왕조를 세웠습니다. 선출로 칼리프를 세우는 관례가 깨진 것입니다. 이슬람의 민주적 공동체가 파괴되었다는 비난을 일축하고 그는 독단적으로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정해 세습 왕조의 길을 열었습니다. 무아위야는 이어서 수도를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천도했습니다.
한편, 무아위야에 패배한 알리 당파를 시아파(시아는 알리를 지지한다는 의미)라고 하는데, 그들은 알리와 그 자손을 정통 후계자라 주장하며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했습니다. 그에 반해 우마이야 왕조를 지지한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수니(관행, 범례)를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정통 칼리프와 우마이야 왕조 이후의 칼리프를 정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제5대 이후부터 칼리프가 세습되는 가운데 옴미아드 왕조 시대에 이슬람은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동으로는 페르시아 동북부, 서로는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까지 진출했습니다. 무아위야는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두 차례나 공략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는 칼리프 세습 체제를 수립한 후 80세의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정통 칼리프 시대부터 우마이야 왕조까지를 아랍 제국이라 부릅니다. 특히 옴미아드 왕조의 정치는 점차 전제주의로 흘러갔고, 아라비아인 제일주의를 표방하여 피정복민의 개종자를 차별 대우하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 불만이 고조되어 자주 내란이 일어났습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무대
750년, 무함마드 숙부의 자손인 아바스는 아랍인 제일주의의 우마이야 왕조에 반감을 가진 이란인과 시아파 세력 등을 이용하여 우미이야 왕조를 쓰러뜨리고 아바스 왕조를 열었습니다. 수도는 바그다드에 정했습니다. 아바스 왕조는 어느 민족 인가를 따지지 않고 이슬람교도를 동등하게 대했습니다.
한편, 우마이야가의 일족인 압둘 라만은 이베리아반도로 이주하여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고 새 왕조를 열었습니다. 이로써 제국은 분열됐습니다. 우마이야 왕조는 '서칼리프국'이라고도 불립니다. 후우마이야 왕조는 10세기에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751년, 중앙아시아로 진출한 아바스 왕조는 중국의 당과 탈라스 강 연변에서 충돌합니다. 이때 7만 명의 당나라군을 지휘한 사람은 당 최고의 명장인 고선지였습니다. 아바스 왕조는 이 전쟁에서 당을 격파하고, 이때 포로가 된 당의 제지 기술자를 통해 제지 기술이 이슬람 세계에 들어왔습니다. 보통 아바스 왕조 이후를 이슬람 제국이라고 하여, 우마이야 왕조가 지배한 아랍제국과 구별합니다.
이슬람 제국이 전성기를 이룩한 것은 "아라비안나이트"에도 등장하는 제5대 칼리프인 하루 알 라시드 시대입니다. 8세기 말부터 칼리프의 신격화와 관료 제도가 정비되어 전제 체제가 확립됐습니다. 하룬 알 라시드는 학문과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그다드에 '지혜의 집' 이라는 큰 도서관을 건설하고 예술을 보호하는 일에 힘을 쓰기도 했습니다. 또 뛰어난 관개 기술을 기반으로 농업 기술이 향상되고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수도 바그다드는 인구 200만 명에 달하는 도시로 크게 번창했습니다. 아바스 왕조는 영토뿐만 아니라 사상과 학문에서도 세계 경영을 주도하는 대제국이었습니다. 그러나 9세기 이후 재정난에 시달렸고, 투르크계/이란계 무장이 독립하면서 차츰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하루 알 라시드는 809년, 페르시아 동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전하던 도중 병으로 죽었습니다.
서칼리프국
후우마이야 왕조, 서칼리프국 역시 한때는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대규모의 관개 사업으로 농업을 발전시켜 10세기에 전성기에 달하지만, 내분으로 쇠퇴하여 1031년에 멸망했습니다. 그 후에도 이베리아반도에는 이슬람의 군소 왕조의 분립했지만, 이베리아반도 최후의 왕조는 1492년, 스페인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터키인에게 넘어간 이슬람 세계
아바스 왕조의 쇠퇴에 따라 아라비아반도에는 군사 정권이 난립했습니다. 909년, 이슬람교의 시아파 지도자 사이드 이븐 후세인이 북아프리카에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 딸의 이름을 딴 파티마 왕조를 건국했습니다. 그는 알라의 정통 대리인이 통치하는 새 국가를 창건한 것을 발표함으로써 아바스 왕조를 무함마드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파티마 왕조는 홍해와 지중해 무역을 통해 10세기 후반에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11세기 이후 투르크계 셀주크 왕조와 십자군의 공격으로 쇠퇴하여, 12세기 후반에 아이유브 왕조를 세운 살라딘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또한 아바스 왕조에 저항하는 옴미아드 세력이 이베리아반도에 정착하면서 반아바스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946년에는 시아파의 이란계 부이 왕조가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정치와 군사상의 실권을 쥐면서, 칼리프는 종교적 권한만을 갖게 됐습니다. 아바스 왕조는 시아파의 도움을 받아 정권을 창출했음에도 왕조의 운영 과정에서 이들을 소외시킴으로써 이들의 저항을 받아왔습니다. 874년, 중앙아시아에는 이란계 사만 왕조가 세워져 아바스 왕조로부터 독립했지만, 10세기 중반 즈음 투르크계 칼라 한 왕조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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