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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사 상식 13)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 - 진나라
    세계사 상식 2023. 9. 13.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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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의 흥망 - 예견된 진의 붕괴

      진나라는 대외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정에서도 엄격한 법 적용을 했습니다. 법가 사상에 기반을 두고 펼쳐진 개혁 정책으로 법에 따르지 않는자에게는 무거운 형벌을 내렸습니다. 법가 사상으로 무장하고 강력한 전제 정치를 구사했던 것입니다. 이런 엄벌주의와 새로운 정책의 실시, 영원한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시황제의 해외 원정에 따른 징병, 부역, 조세 등의 과중한 부담이 농민들에게 지워졌습니다. 게다가 지주들은 지주들 나름대로 농민들의 피를 빨았다. 결국 뜻 있는 지방 호족과 농민들의 반발을 사기에 이르렀습니다. 

      시황제가 죽자 호족과 농민의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최초의 농민 반란인 진승과 오광의 난이 그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제후들과 장군들도 반기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농민 출신이며 겸허하고 포용력이 좋은 유방과 초나라 장군의 후손인 항우도 이때 병사를 일으켰습니다. 항우는 기원전 206년, 함양에 진격해 진왕인 자영을 살해하고, 함양을 불태웠습니다. 이로써 진은 멸망했습니다. 

     

    한의 통일

      진의 멸망 후 초나라 장군의 후손 출신인 항우와 농민 출신의 유방은 서로 대립했습니다. 항우의 군사인 범증은 세력이 약해 있던 유방을 죽여야 한다고 충언했지만 그 말을 무시하고 유방을 놓아줬습니다. 반면, 유방은 지략가 한신을 기용해 마침매 황제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유방이 기원전 202년, 해하의 전투에서 항우를 무찌르고 한을 세워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방은 법가 사상으로 무장했던 진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유교를 한나라의 통치 원리로 삼았습니다. 진나라가 분서갱유와 유학을 폐하고 잔혹한 법가 사상으로 쉽게 멸망했다고 본 유방은 도교와 유교를 바탕으로 백성들을 위무하는 한편, 가혹했던 법과 세금을 폐지시킴으로써 백성들의 환영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한 왕조 - 한의 발전과 쇠퇴

      한의 유방이 죽자 영토 삭감을 두고 7국의 제후가 반발하면서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반란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난은 한 왕조로 하여금 제후를 억압하는 정책을 추진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한 왕조는 토지를 몰수하고 사사건건 제후의 일에 간섭했습니다. 결국 전국적으로 군국제가 행해지면서 중앙집권제가 확립했습니다. 한의 중앙집권제는 16세에 즉위한 무제 유철에 의해 완성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무제는 황제의 조상에 대한 제사에 맞춰 제후들에게 황금을 헌납하게 하여 제후의 재력을 감소시키기도 했습니다. 

      또한 황제 무제는 유교를 정식 학문으로 삼았으며, 흉노족의 토벌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한반도에 진출해서는 한4군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외교에도 힘을 쏟은 무제는 장건을 대월지로 파견하여 서역의 사정을 파악하기도 했습니다. 무제는 진나라 시절보다 넓은 국토와 부유함에 바탕을 두고 봉선의 의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기록관인 태사령은 바로 '사기'를 지은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이었습니다. 그는 봉선의 의식에서 제외된 뒤 아들인 사마천에게 태사령이 될 것과 역사 기록자로서의 대를 이을 것을 유언했습니다. 결국 사마천은 '사기'를 저술했습니다. 

      무제는 봉선 의식을 치르며 북방의 군대 10만 명을 해산시켰습니다. 태평성세의 시대에는 많은 군대는 모순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의 해외 원정으로 농민의 몰락이 끊이지 않았고, 노비로 전락하는 자가 증가했다. 결국 무제 사후에 황후의 일족과 환관이 정쟁을 되풀이하며 한의 등불도 스러져갔습니다. 

     

    왕망이 건군한 신

      자신의 아들들까지도 실수한 일을 두고 자살하라고 명령했던 왕망. 기원전 1년 한의 애제가 사망하자 태왕태후 왕씨는 왕망을 불러들였습니다. 애제 다음으로 황제에 오른 평제의 보좌로 그를 불러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평제는 왕망에 의해 14세에 급사해 버렸습니다. 평제가 죽은 뒤 왕망은 선제의 손자인 겨우 두 살짜리인 유영을 황제에 앉힌 후 스스로를 섭황제라고 부르며 섭정을 했습니다. 서기 8년에 이르러 천명이 내린 상서로운 일이 일어났다며 드디어 황제로 등극한 후 신을 건국했습니다. 

      그는 과거의 주나라를 이상으로 삼아 토지 사유와 매매를 금지하고 노비 매매를 금지하는 등,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을 강행해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혼란은 곧바로 난으로 이어졌습니다. 한 지방 관리가 과실을 저지르자, 현의 장관이 그를 죽여 버렸습니다. 죽은 관리의 모친인 여모가 젊은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들은 적과 구분하기 위해 눈썹을 붉게 칠하고 다녀 '적미군' 이라고 불렀습니다. 불과 수백 명에 불과했던 적미군은 전성기엔 10만 명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이런 농민들의 반란과 호족층의 반항에 부딪치면서 신나라는 23년, 한의 일족인 유수에 패하여 멸망했습니다. 이후 후한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중국 400년의 최장 왕조, 한

    후한의 흥망

      왕망을 멸망시키고 후한을 건국한 유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한의 황실인 유씨에서 갈라져 나온 선비로서 사람들의 신망을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 역시 혼란하고 어지러운 정국을 틈타 형인 유연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많은 세력가들이 유씨 형제에 호응했습니다. 유수는 본가의 유현을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그러나 유수와 유연의 명성을 두려워한 유현은 유연을 죽이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유수는 겉으로는 황제의 뜻을 잘 따랐습니다. 이후 유수는 신의 장안을 점령하여 왕망의 신을 멸하고, 유수가 추대한 유현을 죽인 적미군에게 항복을 받아낸 후 황제에 오르게 되니, 이것이 후한의 시초였습니다. 서기 25년의 일이었습니다. 광무제는 외척과 환관의 세력을 억누르고 유교를 정치의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주변 국가들과는 군신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후한 시대에도 중국은 안정된 국력을 기반 삼아, 적극적으로 해외 원정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후한이 적극적으로 해외 원정을 나설 수 있었던 데에는무장 반초가 있어 가능했습니다. 북쪽의 흉노를 토벌하고 카쉬가르, 쿠차 등 북쪽 흉노 지역의 50여 개의 도시국가에 영향력을 회복한 반초는,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서역 경영을 추진하여 인도의 쿠샨 왕조를 무찌르고 비단길을 확보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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